
조수 웅덩이에서 발견된 대서양피로솜(Pyrosoma atlanticum) 군체. 사진: Rhododendrites, CC BY-SA 4.0. 이 정지 사진은 젤라틴질 외피와 촘촘한 개충 배열은 보여 주지만, 살아 있는 군체의 바깥→안쪽 수류, 느린 추진, 심해의 청록색 발광, 빛이 퍼지는 순서는 증명하지 못한다.
Artifact
어두운 바다에서 반투명한 원통 하나가 떠간다. 표면은 오이 껍질처럼 오돌토돌하고 한쪽 끝은 열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동물의 거대한 몸이 아니다. 몇 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동물인 개충(zooid) 수백 개가 젤라틴질 외피에 박혀 함께 만든 군체, **피로솜(pyrosome)**이다. 이름은 그리스어로 ‘불의 몸’을 뜻한다. 많은 종이 자극을 받으면 청록빛을 내기 때문이다.
피로솜의 낯섦은 빛보다 먼저 구조에서 시작된다. 개충마다 바깥 바다를 향한 입수 구멍과 군체의 빈 속을 향한 출수 구멍이 있다. 각자는 섬모로 물을 끌어들여 점액 필터에 미세한 먹이를 붙잡고, 걸러진 물을 중앙의 공동 통로로 내보낸다. 수백 개의 작은 배출이 열린 끝으로 모이면 군체 전체가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밀린다. 먹는 일과 숨 쉬는 일과 움직이는 일이 같은 물길을 공유한다.
Observation
눈앞의 원통을 한 마리라고 보면 표면의 돌기들은 피부나 기관처럼 보인다. 확대하면 예상이 뒤집힌다. 돌기 하나하나가 입, 소화관, 생식 구조를 가진 개체다. 반대로 개충 하나만 떼어 보면 군체를 움직이는 ‘엔진’은 찾을 수 없다. 추진은 개충 밖, 모두가 물을 내보내는 속 빈 중앙에서 합쳐진다.
흐름의 방향도 중요하다. 물은 열린 끝에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원통의 옆면 곳곳에서 각 개충 안으로 들어가 먹이를 남긴 뒤 중앙으로 모이고, 마지막에 한쪽 끝으로 빠져나간다. 따라서 군체의 빈 공간은 남는 구멍이 아니라 수백 개의 식사와 호흡을 한 방향의 운동으로 바꾸는 공동 배기관이다.
다만 이 움직임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피로솜은 플랑크톤성 동물이라 큰 이동은 해류와 파도에 좌우된다. 개충의 섬모가 만든 제트는 군체를 느리게 조정하는 수준이다. 또한 빛이 개충에서 개충으로 이어져 군체 전체가 번쩍이는 현상은 관찰되지만, 발광의 제어와 생태적 기능에는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다. ‘협동’이라는 말이 곧 하나의 지휘부를 뜻하지는 않는다.
Multiple Lenses
형태학 — 피부처럼 보이는 개체들의 도시
피로솜의 외벽은 하나의 몸이 수많은 세포를 가진 모습과 닮았지만, 그 단위들은 세포가 아니라 개충이다. 각각은 개체이면서 동시에 군체의 벽, 필터, 펌프가 된다. 스케일을 바꾸는 순간 ‘부분’과 ‘개체’의 자리가 뒤집힌다.
유체역학 — 공동의 빈 곳이 만드는 추진
군체의 핵심 기관처럼 보이는 중앙 통로는 살아 있는 조직이 거의 없는 빈 공간이다. 그러나 모든 출수 방향을 한데 모으기 때문에 그 빈 곳이 운동의 축이 된다. 구조의 기능은 재료가 채운 부분뿐 아니라, 재료가 비워 둔 방향성 있는 공간에서도 생긴다.
생태학 — 먹는 동안 탄소를 아래로 옮기는 몸
피로솜은 효율적인 여과섭식자다. 대규모 번성은 식물플랑크톤과 먹이망을 바꿀 수 있고, 배설물과 죽은 군체가 가라앉으면 표층의 탄소를 깊은 바다로 보낸다. 개별 개충의 작은 여과가 군체의 이동을 만들고, 군체의 수가 늘면 해양의 물질 이동까지 바꾼다. 몸의 경계가 개충에서 군체, 군체에서 생태계로 연속해서 확장된다.
관찰론 — 빛나는 하나를 보고 하나의 의지를 상상하기
피로솜은 기계적 자극이나 빛에 반응해 밝고 지속적인 발광을 보일 수 있다. 인접한 개충으로 빛이 번지는 장면은 하나의 신호가 몸 전체를 달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연속성은 중앙 지휘의 증거가 아니다. 각 개충의 국소 반응이 공간적으로 이어져 하나의 파동처럼 보일 수도 있다. 집단의 동시성을 집단의 단일 의지로 번역하지 않는 주의가 필요하다.
Twist
피로솜의 반전은 ‘작은 동물이 모여 큰 동물이 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군체 전체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장 생물처럼 보이는 표면이 아니라, 아무것도 살지 않는 듯한 속 빈 통로다. 개충들은 하나의 뇌로 명령받아 노를 젓지 않는다. 각자 먹기 위해 만든 물살이 같은 방향의 빈 공간에 합쳐질 때, 군체라는 더 큰 운동 단위가 생긴다. 하나의 몸은 지휘의 통일이 아니라 배출 방향의 정렬에서 나타날 수 있다.
Core Question
수백 개의 개충이 각자 바깥물을 거른 뒤 하나의 빈 통로로 내보내 군체 전체를 움직인다면, 피로솜의 몸은 개충들의 합일까, 공동 통로일까, 아니면 물이 통과하는 동안에만 성립하는 관계일까?
Related Works / Contrast Cases
아니카 이의 테이트 모던 설치 In Love With the World(2021)는 터빈 홀에 공기 중을 떠다니는 ‘에어로브’들을 풀어 놓아 기계와 생물의 새 생태계를 상상했다. 피로솜과 에어로브는 모두 부드럽고 반투명한 형체가 유체 속을 떠다니며, 관람자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읽게 만든다. 그러나 에어로브의 통일성은 센서·프로그램·배터리로 설계된 로봇 개체에 있고, 피로솜의 통일성은 자율적인 개충들의 여과수가 공동 통로에서 합쳐지는 데 있다. 이 차이는 ‘함께 움직임’을 하나의 중앙 제어와 동일시하지 않게 한다.
어슐러 K. 르 귄의 에세이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은 최초의 기술을 공격하는 창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아 함께 운반하는 그릇으로 다시 상상한다. 피로솜의 빈 원통도 무엇을 쏘는 포신보다, 수백 번의 식사 뒤 남은 물을 모아 방향을 주는 운반 공간에 가깝다. 이 렌즈는 중앙 통로를 결핍이 아니라 관계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형식으로 보게 한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Solaris는 움직이는 바다를 하나의 지성으로 읽을 수 있는지 끈질기게 시험한다. 피로솜의 빛과 공동 운동도 관찰자에게 단일 의지를 투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피로솜은 그 투사를 압박한다. 하나처럼 보이는 행동이 반드시 하나의 마음을 요구하지 않으며, 국소 반응과 공유 구조만으로도 충분히 연속적인 장면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Further Reading
- NOAA Fisheries — Pyrosomes
- Lilly et al. — “A global review of pyrosomes: Shedding light on the ocean’s elusive gelatinous fire-bodies”
- Bowlby, Widder & Case — “Patterns of Stimulated Bioluminescence in Two Pyrosomes”
- Berger et al. — “Microscopic and Genetic Characterization of Bacterial Symbionts With Bioluminescent Potential in Pyrosoma atlanticum”
- Tate — Anicka Yi, In Love With the World
- Ursula K. Le Guin —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