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dle Book
Artifact
중세 유럽의 작은 책 가운데에는 책장보다 사람의 허리를 먼저 목적지로 삼은 것들이 있었다. 오늘날 girdle book이라 부르는 제본은 표지를 덮은 가죽이나 천을 책의 아래쪽으로 길게 남겨 두고, 끝에 크고 단단한 매듭을 만들었다. 사용자는 그 매듭을 허리띠 아래에 끼우거나 고리에 걸었다.
책은 걸을 때 등과 표지가 아래위를 바꾼 채 거꾸로 흔들렸다. 하지만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매단 상태에서 책을 위로 들어 올리면 페이지가 독자의 눈앞에서 바로 서도록 글과 제본의 방향이 정해졌다. 읽기 위해 벨트에서 책을 풀 필요가 없었다.
Yale Beinecke Library의 MS 84는 15세기 영국에서 쓰인 Boethius의 《철학의 위안》을 담고 있다. 회색 가죽 wrapper는 책 꼬리에서 약 130mm 더 뻗어 Turk’s head knot로 끝난다. Yale의 제본 기록은 이 책이 허리에서 거꾸로 매달렸지만, 매단 채 집어 들면 바로 읽혔다고 설명한다.
Observation
표지가 가방이 될 때
일반적인 표지는 책의 판을 감싸는 데서 끝난다. girdle book의 표지는 경계를 넘어 길게 흐르며 손잡이와 포장지가 된다. 책과 운반 용기를 별개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가죽이 읽기·보호·휴대를 연속해서 맡는다.
거꾸로가 대기 상태일 때
선반 위 책에는 위와 아래가 고정되어 보인다. 그러나 허리에 매달린 책에서 거꾸로는 오류가 아니라 사용 직전의 자세다. 걷는 방향과 읽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물체는 몸의 다음 동작을 미리 반영해 뒤집혀 있다.
책이 몸의 경로를 따라갈 때
Library of Congress는 휴대용 Book of Hours가 집과 교회뿐 아니라 무덤가에서도 사용됐다고 설명한다. 문서는 장소에 보관되었다가 사람이 찾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일과 이동과 기도의 경로를 몸과 함께 통과하는 동반자가 된다.
많이 보였지만 거의 남지 않았을 때
Newberry Library는 중세 이미지에는 girdle book이 자주 등장하지만 원래 형태로 남은 실물은 26점뿐이라고 설명한다. 반복된 사용으로 가죽이 닳았고, 훗날 선반에 넣기 쉽도록 길게 늘어진 부분을 잘라낸 경우도 있었다. 휴대를 가능하게 한 구조가 보존 과정에서는 제거할 돌출부가 된 셈이다.
Multiple Lenses
인터페이스 — 방향은 사용 순서에 저장된다
책은 몸에 달렸을 때의 자세가 아니라 다음 동작에서 읽히는 자세를 기준으로 설계됐다. 인터페이스의 올바른 방향은 정지한 물체보다 사용 시퀀스에 놓여 있다.
Related Concepts
- Affordance — 형태가 사용자에게 가능한 행동을 암시하는 관계
- Orientation — 콘텐츠의 방향과 사용 맥락이 접근 방식에 미치는 영향
제본 — 표지가 책 밖으로 계속될 때
가죽은 페이지를 보호하는 외피에서 끝나지 않고 운반 장치가 된다. 제본은 내용을 묶는 기술인 동시에 책이 세계를 통과하는 방식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Related Concepts
- Chemise binding — 책의 덮개 재료가 판 바깥으로 연장되는 제본 형식
- Book clasp — 뒤틀리기 쉬운 판과 양피지를 닫힌 상태로 유지하는 장치
신체사 — 지식이 의복의 일부가 될 때
열쇠·주머니·묵주처럼 책도 허리띠에 매달렸다. 무엇을 늘 몸에 지니는지는 개인의 필요뿐 아니라 경건함·학식·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Related Concepts
- Wearable object — 몸과 의복에 결합해 이동 중 기능하는 물건
- Book of Hours — 일상의 정해진 시간에 개인 기도를 수행하도록 만든 책
보존 — 사용 흔적을 제거하면 유형이 사라진다
길게 늘어진 가죽은 책을 들고 다니기 위한 핵심이지만, 선반 중심의 보존에서는 불편한 돌출부다. 물체를 표준 형태에 맞추는 수선이 그 물체의 사용법을 지울 수 있다.
Related Concepts
- Material evidence — 손상과 변형을 포함한 물질 상태가 사용 이력을 전하는 증거
- Conservation ethics — 안정화와 역사적 정보 보존 사이의 판단
독서사 — 읽기는 눈만의 행위가 아닐 때
매듭을 끼우고, 걷고, 책을 돌려 들고, clasp를 풀고, 페이지를 펼치는 동작이 독서에 포함된다. 텍스트의 의미는 같아도 그것을 만나는 몸의 순서는 매체마다 다르다.
Related Concepts
- Embodied cognition — 인지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존한다는 관점
- History of reading — 책의 형식과 독서 관습을 함께 보는 연구
Twist
girdle book은 흔히 중세의 전자책이나 wearable device처럼 소개된다. 늘 몸에 지니고 필요할 때 즉시 열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 비유가 꽤 잘 맞는다.
하지만 현대의 휴대 기기는 화면을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센서가 내용을 다시 맞춘다. girdle book은 내용을 회전시키지 않는다. 대신 책 전체를 몸의 동작에 맞춰 거꾸로 매단다. 방향 보정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제본과 독자의 팔이 함께 수행한다.
더 기묘한 역전은 보존에서 일어난다. 오래 사용해 가죽이 닳거나, 도서관 선반에 맞추기 위해 연장부를 잘라내면 책은 더 평범하고 보관하기 쉬운 codex가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 책이 몸에 어떻게 붙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는 사라진다.
이 책에서 거꾸로는 결함이 아니다. 아직 읽고 있지 않은 몸을 위해 마련된 올바른 방향이다.
Core Question
몸에 매달렸을 때 거꾸로이고 손에 들면 바로 서는 책에서, 책의 ‘올바른 방향’은 물체에 있을까 읽는 동작에 있을까?
Related Works / Contrast Cases
《Werksatz (Workset)》 — Franz Erhard Walther, 1963–1969
공통점
Walther가 설계하고 재봉한 약 50개의 천 조각은 입거나, 들거나, 눕거나, 여러 사람이 함께 펼쳐야 작품의 관계가 드러난다. girdle book처럼 물체의 형태만 바라봐서는 사용 방향을 완전히 알 수 없고, 몸이 정해진 동작을 수행할 때 구조가 활성화된다.
결정적 차이
girdle book의 신체 동작은 이미 쓰인 텍스트를 이동 중 보호하고 읽기 위한 실용적 순서다. 《Werksatz》에서는 바로 그 착용·긴장·거리·협력이 작품의 매체이며, 사용 뒤에 별도의 읽을 내용이 남지 않는다.
질문 강화
물체가 몸의 동작으로만 완성된다면, 의미는 물체 안에 저장되어 있을까 몸과 물체 사이에서 매번 다시 만들어질까?
Further Reading
- Yale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Library, Beinecke MS 84 — 거꾸로 매달리고 들어 올리면 바로 읽히는 제본 방향과 재료 기록
- Newberry Library, Girdle Books, Illuminated Initials, and the Anonymous Master — 1471년 실물, 착용 장면과 surviving corpus
- Library of Congress, Medieval Manuscripts in the Digital Age — Book of Hours의 이동성과 사용 장소
- Kenneth Spencer Research Library, Making a Girdle Book Model — 나무 판·가죽·clasp·매듭을 재현한 제본 과정
- Tate, Franz Erhard Walther: Werksatz — 몸의 사용으로 활성화되는 구체적 작품과 퍼포먼스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