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잎 모양의 바다민달팽이가 가느다란 조류 실을 입으로 붙잡고 있으며 몸 안의 가지처럼 뻗은 소화관에 작은 녹색 엽록체들이 퍼져 있는 해부 사진
Elysia chlorotica가 Vaucheria litorea를 먹는 장면. 몸 전체로 뻗은 소화관의 녹색 점들은 조류에서 가져와 장세포 안에 보관한 엽록체다. Karen N. Pelletreau et al. · 2015 · PLOS ONE / Wikimedia Commons · CC BY 4.0 · Source

1. Artifact

초록색 바다민달팽이가 실처럼 가느다란 조류에 입을 댄다. 세포벽을 뚫고 내용물을 빨아들인 뒤 대부분은 소화하지만, 엽록체는 부수지 않는다. 엽록체는 몸 전체로 뻗은 소화관의 세포 안으로 들어가 녹색 점이 된다. 먹이는 사라졌는데 먹이의 광합성 장치는 남는다.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먹은 자리에서, 소화되지 않은 부품이 임시 기관처럼 계속 작동한다.

2. Observation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의 염습지에 사는 Elysia chlorotica(엘리시아 클로로티카)는 Vaucheria litorea라는 조류를 먹는다. 어린 개체는 갈색에 가깝지만 조류를 섭취한 뒤 몸이 녹색으로 변한다. 조류의 엽록체가 촘촘하게 갈라진 소화관을 따라 장세포 안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생물의 색소체를 빼앗아 보존하는 현상을 도둑색소체현상(kleptoplasty)이라 부른다.

엽록체는 원래 조류의 핵과 협력해야 오래 작동한다. 광합성 장치를 유지하는 많은 단백질이 엽록체가 아니라 핵 유전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민달팽이 안의 엽록체는 조류의 핵과 분리된 뒤에도 오랫동안 광합성을 이어간다. 한때 조류 유전자가 동물 게놈으로 옮겨갔다는 설명이 주목받았지만, 후속 연구는 그 가설이 모든 유지 능력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남는 질문은 더 까다롭다. 낯선 세포 환경이 엽록체를 파괴하지 않고 어떻게 버티게 하는가?

3. Multiple Lenses

소화의 예외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분해한다는 뜻인가?

소화는 외부 물질을 작은 분자로 바꾸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민달팽이는 먹이의 일부를 분해하지 않고 기능 단위로 보존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었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파괴를 멈췄는가다. 면역과 소화가 엽록체를 적으로 처리하지 않는 순간, 장은 분해 공장에서 부품 보관소로 바뀐다.

Related Concepts

  • 식세포작용 — 세포가 외부 입자나 세포 소기관을 감싸 내부로 들이는 과정
  • 선택적 소화 — 섭취한 물질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분해하지 않는 대사적 선별
  • 자가포식 — 세포 내부 구성요소를 분해하고 재활용하는 품질 관리 체계

빌린 기관

기능을 수행하는 부품이 몸 밖에서 왔다면 그것은 누구의 기관인가?

엽록체는 민달팽이의 유전자가 만든 기관이 아니며 자손에게 그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개체는 성장 과정에서 조류를 먹어 매번 새로 확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엽록체는 민달팽이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고정하고 대사에 기여한다. 소유권은 기원, 위치, 유지 책임 가운데 어느 기준으로 정해야 할까. 기관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부품이 아니라 일정 기간 관리되는 기능 계약일 수도 있다.

Related Concepts

  • 세포소기관 — 세포 안에서 특정 기능을 맡는 구조
  • 내공생설 —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과거 독립 생물에서 유래했다는 설명
  • 확장된 표현형 — 유전자의 효과가 몸 밖 구조와 다른 생물까지 뻗는다는 관점

빛의 보조금

광합성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광합성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같은가?

도둑색소체를 가진 민달팽이는 흔히 ‘태양광 동물’로 소개된다. 하지만 빛을 차단하거나 광합성을 억제한 실험에서 일부 종이 상당 기간 버틴다는 결과도 있다. 광합성은 생존을 전부 떠맡는 엔진이 아니라 굶주림을 늦추고 성장이나 번식 조건을 바꾸는 보조금일 수 있다. 눈에 띄는 능력이 반드시 가장 큰 생태적 기능은 아니다.

Related Concepts

  • 광종속영양 — 빛을 에너지원으로 쓰지만 탄소는 유기물에서 얻는 방식
  • 대사 유연성 — 환경에 따라 여러 에너지 경로의 비중을 바꾸는 능력
  • 기능적 중복 — 한 기능이 사라져도 다른 경로가 일부 역할을 대신하는 구조

경계의 노동

다른 생명의 장치를 오래 살려 두려면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엽록체를 얻는 행위보다 어려운 일은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민달팽이 세포는 빛과 산소가 만드는 활성산소를 견뎌야 하고, 손상된 엽록체를 골라내면서도 쓸 수 있는 엽록체는 보존해야 한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새 기능을 발명한 데 있지 않다. 파괴, 격리, 수리의 문턱을 조정해 낯선 부품이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든 데 있다.

Related Concepts

  • 항상성 — 내부 조건을 기능 가능한 범위로 유지하는 조절
  • 활성산소 — 광합성과 호흡 과정에서 생기며 세포를 손상시킬 수 있는 반응성 분자
  • 공생 — 서로 다른 생물이 가까운 관계에서 기능과 비용을 주고받는 상태

4. Twist

Elysia chlorotica를 ‘식물이 된 동물’이라 부르면 놀라움은 커지지만 구조는 흐려진다. 이 동물은 엽록체를 직접 만들지 않고, 조류 전체를 공생자로 보존하지도 않는다. 먹이의 세포를 해체하면서 특정 부품만 골라 자기 세포 안에 남긴다. 식물과 동물의 중간 존재라기보다, 소화와 보존의 경계를 비정상적으로 정교하게 조절하는 포식자에 가깝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관계가 완성된 합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엽록체는 세대를 넘어 안정적으로 유전되지 않는다. 다음 세대는 다시 조류를 만나고, 먹고, 선택적으로 보관해야 한다. 진화는 언제나 영구적인 통합으로만 전진하지 않는다. 매 세대 반복해서 외부에서 조달하는 느슨한 결합도 충분히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도둑색소체현상이 흔드는 경계는 식물과 동물 사이만이 아니다. 기관과 자원, 소유와 임대, 진화한 능력과 매번 다시 획득하는 기술 사이의 경계도 함께 흔든다. 몸은 스스로 만든 부품의 집합이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얼마나 오래 살려 둘지를 조절하는 임시 생태계일 수 있다.

5. Core Question

다른 생명의 부품을 파괴하지 않고 자기 대사 안에서 계속 작동시키는 능력은 새로운 기관의 탄생인가, 아니면 몸이란 경계가 생각보다 느슨하다는 증거인가?

6. Further Reading